언젠가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CPU와 GPU의 작동 원리를 다룬 영상을 접한 적이 있다. 예체능 출신인 내가 이해한 바로는 단순하다. CPU가 하나의 작업을 강력한 성능으로 처리하는 직렬 방식의 고성능 코어라면, GPU는 적당한 성능으로 수많은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는 병렬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 개념을 보고 사람에게 대입해 보니 이해가 빨랐다.
우리 주변만 둘러봐도 명확히 갈린다. 우직하게 한 우물을 깊게 파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호기심에 이끌려 다방면의 분야를 이것저것 ‘찍먹’ 해보는 사람이 있다. 다른 말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의 차이다.
영상 출처 : bRd 3D
그렇다면 나는 어느 쪽인가. 난 GPU형 인간에 가깝다. 성향상 한 가지 일에 2년 이상 몰두해 본 기억이 희미하다. 매번 관심사는 바뀌고, 원리를 대충 파악했다 싶으면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한 분야를 마스터하지 못하고 두루두루 얕게 경험하는 유형이다. 디자인 영역의 일러스트, 사진, 그래픽, 3D, 웹디자인부터 학문 영역의 서양철학, 통계학, 미학까지. 너무 얕게 파고든 건 생략했지만 발가락만 살짝 담갔다 뺀 분야가 수두룩하다. 물론, 지금은 기억이 흐릿하다.
관념이 현실이 되는 시대
관념이 현실이 되는 시대
그러나 휘발된 기억 속에 남겨진 앙금은 분명 존재한다. 사진에서는 빛을 읽는 법을, 3D 모델링에서는 형태가 만들어지는 순서와 좋은 형태가 무엇인지를, 통계학은 숫자의 함정에 속지 않는 법을, 철학은 현상을 잘게 쪼개고 질문하는 법을 남겼다. 미학을 통해선 감각에 속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심만 많아진 것 같긴 한데 다양하게 생각하는 법을 얻은 셈이다.
어쩌면 하나를 진득하게 하지 못했던 나의 기질이 아는 척하기 좋은 시대에 온 것 같다. 바로 생성형 AI의 등장 덕분이다. 경험의 앙금들이 AI와 합치면서 호기심을 가지고 서슴없이 질문하는 것이 편해졌다.
과거에는 여러 분야를 기웃거리며 얻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기술적 장벽 탓에 실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포기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프롬프트 몇 줄이면 꽤 그럴싸한 구색을 AI가 맞춰준다. 관념의 영역에 부유하던 생각들을 한 차원 낮춰 손에 잡히는 결과물로 만들어주는 세상. 오랜 기간 느껴왔던 실행의 답답함이 해소되는 순간이다.
유형이 아닌 모드
유형이 아닌 모드
다시 CPU와 GPU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시계를 2010년대 초반으로 돌려보면, 내가 그땐 10대 후반이었으니깐, 당시 우리에게 고성능 CPU가 되기를 강요했다. 고등 교육부터 대학 전공에 이르는 과정은 일종의 ‘단일 고성능 코어 만들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판이 바뀌었다. 내가 하나의 분야에서 퍼포먼스를 내는 방식을 안다면, 즉시 GPU 모드로 전환해 인접해 있는 분야로 확장하는 유연함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졌다. 이런 모드 바꾸는 것도 해봐야 익숙해진다. 이제 10대의 교육 과정은 이전과 다른 형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은 필요 없어질지도? (옆 동네 팔란티어 CEO인 알렉산더 카프는 대학 무용론을 외치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면 CPU는 ‘몰입의 깊이(Depth)’에 대한 이야기이고, GPU는 서로 다른 맥락을 잇는 ‘연결의 확장(Connection)’에 대한 이야기다. 종종 스페셜리스트, 제너럴리스트를 다른 테크트리처럼 이야기하는데 내 경험상 이 둘은 다른 직업 같은 게 아니라 태도만 다를 뿐이다. 그때그때 스위치를 바꿀 수 있는 모드 같은 것이다.
하나를 진득하게 파고들어 자신의 CPU 성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했다면, 그 몰입의 감각을 가지고 다른 분야로 넘어가 GPU처럼 연결하고 확장하는 것을 권한다. 이 반복된 과정이야말로 지금 기계놈이 내 일자리를 뺏는 시대에 내 생각의 깊이와 범위를 동시에 넓히는 가장 확실한 전략이다.
정리하자면…
한 분야에 깊게 몰입하는 'CPU(스페셜리스트)'와 다양한 분야를 얕게 경험하며 연결하는 'GPU(제너럴리스트)'는 직업의 구분이 아닌 상황에 따라 전환 가능한 '태도의 모드'이다.
다양한 경험의 앙금(Insight)을 가진 GPU형 인간은 생성형 AI라는 도구를 통해 실행의 장벽을 낮추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하나의 분야에서 몰입(CPU)의 끝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인접 분야로 유연하게 확장(GPU)하며 맥락을 연결하는 것을 권장하며, 현 시대의 생존 방식에 가까울지도...
이런 것도 생각해볼 수 있어요
현재 내가 진득하게 해본 것은 무엇이 있고 그것을 토대로 확장할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요? 내 경험에서 남은 앙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나는 조직에서 어떤 유형일까요? 조직 관리 차원에서 본다면, CPU형 모드에 가깝다면 팀원에게 '디테일과 완성도'를 요구하고, GPU형 모드에 가깝다면 '융합과 새로운 시도'를 독려할 것 입니다.
앞으로의 교육은 어떻게 흘러갈까요? 대학 무용론까지 거론되는 시점에서, 미래의 커리어는 학위라는 '자격증'보다 더욱 더 능력 증명하는 '포트폴리오' 중심으로 재편되지 않을까요?